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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이은상 선생

마음은 파도를 타고 2009. 2. 17. 09:20

오늘 문득 고등학교 시절 감동있게 들었던 국어선생님이 을프셨던 시  이은상 선생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가 떠 올랐습니다. 

"예서 말수는 없다"

공부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서 떠 오른 글이라 함께 나눕니다.   또한 인터넷을 찾으며 2개의 해설 글을 함께 올립니다.  하나는 국어논술사이트의 글이고 또 하나는 이은상선생의 일대 요약글 입니다.  일제 시 감옥에도 가셨던 분이 해방 후 권력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어디까지 뿌리를 내려야 하는지 교훈을 함께 받습니다. - 씨알성균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래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넘어지고 께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래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싶다.

 

 

해설

 

1954년 그믐날 밤에 쓴 송년시이다. 6·25 동란으로 인해 민족의 고난을 의지와 투지로 극복하도록 다짐하고 있는 시조이다.

'고난, 능선, 고지, 심장' 등의 관념적인 시어로 서술되었으나, 민족 현실의 상황을 제시하고 민족정신의 한 강한 의지는 깊은 감동을 주고 있으며, 고시조에서 볼 수 없는 시조 형식의 대담한 파격을 보이고 있으며, 역동적인 시어 '능선, 고지, 핏속, 심장' 등이 시적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능선'은 우리 민족의 시련, '밤'은 암담한 국토 분단의 현실, '고지'는 조국 통일, '심장'은 민족혼, '새는 날'은 조국 통일의 성취 등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역경과 고통이 스미는 아픔이라도 '예서 말 수는 없다'는 강렬한 신념과 의지로 인생을 꽃피워 보자는 호소를 하고 있는 듯하다. 국토 분단의 현실적 상황에서의 강렬한 새 역사 창조의 의지가 실천되었을 때 진정한 민족의 웃음은 꽃피리라는 뜻으로 종장을 마무리 짓고 있다.

 

 이은상은 그의 자신의 글에서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시조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난(受難)하는 민족(民族)이다. 통일과 번영을 위해 싸우는 민족(民族)이다. 지금 이 밤에도 쉬지 않고 싸우는 것이다. 기어이 고지를 점령(占領)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고지는 자유(自由)와 평화(平和)와 승리(勝利)를 전취(戰取)할 수 있는 지점을 이름이다. 우리는 그 고지를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다. 바로 그 고지가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들의 행진을 포기할 수 없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그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이것이 제 1연의 뜻이다.

 

 그 당시 우리는 패배(敗北)의 쓴잔을 맛보았었다. 가는 곳마다 처참한 전쟁의 자취 뿐이요, 그 중에서도 서울은 완전히 폐허(廢墟)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깨뜨릴 수 없는 심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심장은 나라 사랑하는 의기와 정열을 이름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보배인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장을 안고 가자. 반드시 우리에게는 영광의 시대가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향해서 간다. 이 유혈 속에서 통일과 번영의 내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굳이 그것을 노래하고 싶었다. 이것이 제2연의 뜻이었다."

 

박남수의 국어 논술아카데미 | 씨에씨에
http://blog.naver.com/siesieni/150011049815

 

 

이은상 선생의 평가

 

노산 이은상 선생을 평가 하는데 있어서 일제 강점 하 에서 민족주의 적 시조인으로 혹은 시인으로 전통적인 시조를 창작하여 우리 전통 시조를 계승한 문화적 업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인정을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다른 평가는 자유당정권의 이승만,  5.16군사정권의 박정희, 신 군부 정권의 전두환의 정권에 아부하면서 문학적 권력을 치부해온 어용 지식인이라는 평가가 지적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은상 선생은 1903년 마산에서 교육가인 이승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부친과 관련되어있는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1923년)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교(1925~1928)사학과 국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마산의 작은 명산 노비산 에 올라 시조한편을 남기고 노비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노산이라 한다 (내놀던 옜동산에 올라와 다시서니....생략)

 

여러 월간지의 주필 혹은 편집책임자로서 (신가정, 조선일보,신생등) 1942년 해방을 3년앞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생활도 잠시하였다고 한다 해방후 호남신문을 창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은상 선생이 일제 강점기시절인 1933년에 발표한 노산 시조집에는 생동적이며 우리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민족주의적 시조집이었다 이 시조집에서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려는데 무진 애를 썼다고 하며 또 한편의 작품인 "고지가 바로 저긴데"에서는 통일의 염원을 간절하게 표현한 이작품집들을 통해볼때 그는 분명히 민족주의자였고 우리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해방이되자 그는 이승만의 시녀가 되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여러 직책의 감투를 쓰고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단편적인예로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해에 그는 문인 유세단이라는것을 조직하여 선거 지원 유세를하였으며 특히 대구 유세에서 이나라를 구할 사람은 이순신같은사람이나와야하며 바로 이승만이 그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연설을 하였다고하는 기록이있다.  이승만뿐이 아니고 이기붕까지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마르도록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유당정권이 망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이번에는 박정희정권을 찬양 하는 글들을 서슴없이 집필하였다 그는 공화당 창당문을 작성했으며 문화 행정자문이 되어서 민족 문화협회장등 다양한 감투를 썼다.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그 비문을 작성하였으며 특히 박정희를 조상의 얼과 전통을 되살리고 대한민국을 세계속으로 발자국을 내딛게한 민족의 탁월한 영도자로 서술하고 있다.

 

다시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전두환을 극찬하고 나선 이은상이었다. 이 은상은 1980년 9월호 정경문화에서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는 들을 썼으며 내용을 보면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보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것이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집필하여 전두환으로부터 신임을받아 국정 자문위원이 된다.

 

이와같이 노산은 양극적인 두가지의 평가를 받는다 하나는 뛰어난 시조 작가이며 민중시인으로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자로 또다른 한편은 해방후 독재 정권에 아부하여 권력을 쫓아살아온 어용 지식인으로 비판하는 계층이다. 우리는 이러한 두 관점을 놓고 생각해볼대 문화적 업적과 민족적 업적에대한 평가는 평가를 하고 권력의 시녀로서 정권에 아부하고 찬양하며 권력에 비리붙어 출세와 명예를 따라 다녔던 점 에 대한 평가도 되새겨야 할것이다

 

출처 : NAVER 지식-IN. 작성자 apcnfl12

출처 : 씨알마음
글쓴이 : 씨알성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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